HOME > 도서안내 > 학민글밭
 
동농 김가진 전
지은이 : 김위현(金渭顯)
가  격 :   30,000원
ISBN : 978-89-7193-191-2 (03990)
초판발행일 : 2009년 7월
1919년 10월 10일, 허름한 한복 누더기 차림의 노인과 젊은이가 일산역에서 신의주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은 애써 태연한 척하였지만, 행색부터가 고아한 두 사람의 몸가짐에 비추어 어색하기 짝이 없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신의주를 거쳐 중국 땅 안동에서 상해행 기선에 오를 수 있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에서 갓 태어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느 날 갑자기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망을 뚫고 조국을 탈출하여 나타난 이 두 사람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동농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이었다. 김가진은 구한말에 주일본판사대신, 병조참의, 충청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 공조판서,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중추원의장 등을 지낸 거물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고, 일제로서는 충격이 엄청났다.
김가진은 조선민족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겨 조직을 강화하고, 만주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등 불철주야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워낙 고령이어서 상해 망명 3년 만에 77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김가진의 장례를 국장에 버금가게 성대히 치렀다.
김가진의 묘는 상해 서가회 만국공묘 안에 있었다. 1922년 안창호, 신규식, 김구 등이 주동이 되어 그럴듯한 묘비를 세웠지만, 1960년대 홍위병 사태 때 묘비, 봉분이 모두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곧 김가진의 시신은 이제는 ‘송경령능원’으로 변한 공원의 아스팔트 산책로 밑에서 중국인 장삼이사들의 구둣발에 짓밟히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책은 조선 말기 격변하는 시기에 태어나 쓰러져 가는 조선조의 중흥을 위한 제도혁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개혁 관료 김가진, 한일병합 후에는 나라를 잃은 망국의 유민으로 전락하면서 두문불출 곤고한 세월을 보내다가 삼일독립운동을 계기로 분연히 항일독립운동단체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 총재에 취임한 김가진, 삼일운동 후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동농 김가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한 인물이어서 사람마다 다른 각도로 기술하고 있다. 어떤 이는 관료 경력을 중시하여 고관을 지낸 사람으로, 어떤 이는 사회계몽운동과 교육에 정열을 쏟았던 사람으로, 또 어떤 이는 독립운동가로 기술하는가 하면 율시에 능하다 하여 시인으로, 또 독립문 현판, 비원 주련 등 많은 유작이 있어서 서예가로 기술하였으므로 그의 진면목을 찾기 어려웠다.
이 책은 그러한 여러 면을 통괄하여 김가진의 전 생애를 연대순에 따라 기술하였다. 후손들이 간직해온《동농가장문서》에 김가진의 시문 및 글들이 다수 남아 있어 사실대로 기술할 수 있었으며,《조선왕조실록》등의 사료에 나타난 김가진의 상소문, 행적을 발굴하여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그의 일생을 평가했다.
 
         
필자가 동농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었지만, 그저 조선 말년에 고관을 지낸 분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또 동동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기술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관료 경력을 중시하여 문과 급제 후 공조판서와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사람으로 기록하였고, 또 어떤 이는 사회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중심을 두었고, 어떤 이는 대한협회 회장과 임시정부 요인으로만 기술하였다. 혹은 서예가·시인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동농에 대해 하나같이 종합적이 아닌 부분적인 기술만 하였으므로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기억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농의 생애를 시기로써 구분한다면, 출생에서 30대까지는 성장과 수학기, 32세부터 63세까지는 사환기(仕宦期), 64세부터 77세까지는 사회활동 및 독립운동기라 하겠다. 그는 이미 15세 때 경 · 사 · 자 · 집에 통달한 사람이라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소과를 보지 않고 대과에 직부(直赴)될 정도였다. 틈틈이 배운 일어, 중국어, 영어는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한층 높여주어, 종사관으로 시작하여 특명전권공사까지 10여년을 봉직하면서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동농의 업적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농은 1883년 인천항감리서 서기관으로 있으면서 조계설항에 따른 개항·통상규정을 정하였다. 이는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885년 내무부 주사로 있으면서 전보충사를 설치하고 전선을 가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여러 나라와 통신을 하게 하였다. 1886년에 종목국 설치를 건의하여 마장리와 청파에 사육장을 두고 외국에서 수입한 말·소·양·돼지 등을 기르게 하였다.
1887년에는 일본국에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는데, 정사가 국서만 전달하고 귀국하자 서리판리대신으로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 후 판리대신으로 승진하여 동경에 공사관을 마련하고 태극기와 절모를 공사관 앞에 세움으로서 규모와 위의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임금의 명을 오손시키지 않고, 국체를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각국 공사와 일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하여 독립국으로서의 자주외교를 펼치었다.
1890년 여주목사로 있을 때는 도결(都結)을 혁파하고 원세법을 적용하여 백성들을 구한 공로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94년 6월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정치개혁에 참여, 무려 16일간이나 경희루에 머물면서 시의에 맞는 개혁법안을 기초하였다. 1895년에는 농상공부의 별설로 우체국을 개설함으로써 통신이 점차 우체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1897년 황해도관찰사로써 도내 적폐를 일소하고 공립소학교를 창설, 의연금으로 학교를 운영케 하였다. 1899년 사립양잠회사를 설립하고 양잠기사를 양성하는 전습소를 겸설, 경향 각지에서 잠업에 종사할 수천 명을 길러 내었다. 1904년 법무대신 겸 형법교정소 총재로써 고금동서 법률을 참작, 형법삼편을 엮어 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06년 충청남도 관찰사로써 관내 교육실태를 살펴 본 결과 다른 도에 비하여 뒤떨어져 있으므로 각군 군수가 학교를 설립, 향교의 수곡과 연조금으로 운영케 하였다. 1907년 교육구국의 뜻을 품고 기호흥학회에 적극 참여하여 기호학교를 설립하고 유지경영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동농은 1908년 대한협회 회장으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펼쳐 각지에 많은 학교가 설립되게 하였고, 교과서도 많이 편찬하였다. 한일합방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한 동안 칩거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직에 취임하여 대일항전의 선봉을 맡아 각 부서들을 지휘하였다. 1919년 10월 74세의 노구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고문으로 참여,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동농은 근래에 들어와 젊은 학자들에 의하여 재조명되고 있다. 2002년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에서「동농 김가진과 한국 민족운동」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어 동농의 개화운동, 계몽운동, 조선민족대동단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2003년 대동단기념사업회에서 조선민족대동단 의기 84주년 기념「조선민족대동단의 역사적 재조명」이란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두 학술회의에서는 동농이 항시 조선민족대동단 활동의 중심에 서 있음을 밝히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그밖에 신문, 잡지 등에도 동농에 대한 단편적인 글들이 발표되었으나 아쉽게도 동농의 전 생애에 대한 기술은 없었다.
이 책은 동농의 전 생애를 포괄, 기록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이 책은 동농의 삶과 활동에 대한 분석과 평가보다는 그저 존재한 사실 그대로를 연대순으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일반적인 사실들은 자료가 부족하고 단순하여 동농 당시의 관습에 맞게 부연, 추론하여 기술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동농의 전기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갖기도 한다. 물론 추후 더 정확하고 세세한 자료가 발굴되면 보완할 것이다.
이 책을 계획하고 사료를 찾아보다가 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광무개혁 때 동농이 올린 상소문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또 동농의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는 자료들도 접하게 되었다. 이 가장문서를 보면서 두어 가지 면에서 경탄하였다. 첫째는 어떻게 동농이 자신의 시초(詩抄), 공부(共賦), 이력서, 잡저(雜著)를 남길 수 있었나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동농이 상해로 망명하면서 집안이 완전 파탄 났는데도 자료들을 간직하여 온 후손들의 정성에 놀랐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여러분의 절대적인 도움이 컸다. 사료의 제공, 구술, 증언해 주신 동농의 손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바쁜 가운데도 교열을 맡아준 증손녀 김선현 사장, 자료수집에 도움을 준 김휘동 안동시장과 박동명 안동시박물관장, 촬영에 편의를 봐준 이광섭 덕수궁관리소 서무팀장, 그리고 어려운 사정에도 선뜻 출간의 마무리를 지어주신 학민사 김학민 사장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09년 삼일절에

김 위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