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김재용(문학평론가,원광대 교수)
유격적 장르로서의 수필과 우회적 저항
박승극은 『半島の光』 1943년 1월호에 발표한 수필의 필자 약력 난에 자신을 수필가로 적고 있다. 소설가라든가 평론가라든가 하는 말은 없고 오로지 수필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 동안 소설가와 평론가로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인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박승극이 발간한 단행본이 소설집이나 평론집이 아니고 수필집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자기소개가 뜬금없는 일은 아니다.(검열로 인하여 소설집과 평론집은 출판하지 못하였다고 본인 스스로 밝힌 바 있다). 1938년에 『다여집』이란 수필집을 발간하였고, 1940년 이후 오로지 수필만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1938년에 발간된 『다여집』에 실린 글은 1933년 4월 옥에서 나온 이후 틈틈이 쓴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1933년 이전에 발표한 것들은 검열의 탓인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분명치 않지만,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아져 1938년에 발표된 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보아 수필가로서의 자의식을 한층 강화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농조사건으로 영어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1933년 무렵은 우리 문학계와 사상계 전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때이다. 카프 내에서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뿐이라고 하면서 문학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논의들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진보적 운동을 하던 이들이 하나씩 전향선언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나마 운동의 지향을 지속하던 이들에게 있어서도 집단적 주체는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뿔뿔이 흩어져 각개약진을 하던 시대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박승극은 소설과 평론 대신에 수필을 유격적 양식으로 간주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검열의 눈을 피하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필이란 장르가 잘 맞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과 평론 대신에 점점 수필에 강화하였고, 1938년에는 이것들을 모아 수필집을 내기에 이른다. 『다여집』이 출간되었을 때 구 카프 작가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임화의 서평과 달리 이기영의 서평은 이 책이 갖는 특징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흔히 글은 사람과 같다 한다. 글이 앞서는 이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 박형은 글과 사람이 똑 같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 말이 틀리지 않다면 『‘다여집』은 마치 박형의 인격을 거의 정신적으로 뭉쳐 논 것 같다 할 것이다. 그의 건실한 사상과 깐깐한 문장과 그러면서도 정열적인 것이 우선 그렇게 보인다. 실로 『다여집』은 박형의 면모를 약여케 한다. 과거의 그의 언동이 젊은이로서는 지나칠 만큼 침착결백하고 또한 사회악에 정면으로 부닥쳐온 긴장된 생활경험이 풍부하였던 만큼 그의 문장에는 로맨틱한 영롱이 없는 대신에 준엄한 기상이 어디나 나타난다. 한 말로 말하면 이것이 박형의 특징이오 장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아기자기한 문장의 아로새김이나 화려한 문채를 갖추지 못한 것을 탓할는지 모르나 만일 이 두 방면을 쌍전치 못하다면 나는 차라리 후자보다도 전자를 추들기에 주저치 않겠다. 그것은 더욱 현하와 같이 속악한 문자가 횡행하던 시절에 있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제일 큰 강미를 갖는 시대의 양심인 때문이다. 또한 수필에 있어서는 그것이 쓰기에 쉽다고 내남없이 함부로 끄적이어서 가득이나 수확이 적은 수필단을 더 한층 타락시킴이 없지 않은 이즈음에 박형의 『다여집』과 같은 건전한 내용을 포함한 수필집을 보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기영을 비롯하여 구 카프의 작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던 박승극은 더욱 수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0년에 이르면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동안 자신이 해왔던 모색이 당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빗나갔던 것을 반성하고 농민문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한때 출판사 등을 하면서 시대의 탁류를 거슬러 가보려고 하였지만 그것 역시 결국 자기가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고향 마을로 내려와 완전히 뿌리를 내리면서 농민과 함께하는 농민문학의 길을 걸었다. 19400년 1월 『조광』 잡지에 발표한 ‘생활적인 문학’은 이러한 새로운 길을 알리는 선언에 해당한다. 이후 박승극의 진로를 보여주는 글이라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제약 속에서 생활을 영위해야 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간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으리라. 지나간 한때에는 주어진 제약 속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통일을 위하여 정열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약이 일층 강화되는 시기 사람들은 자체에게 부여된 슬픈 운명에 지질리어 동요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소부대는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였고 소부대는 현실에 휩쓸려 추종하기에 이르렀다. 한데 이상과 현실이 상반될 때 거기서 깨끗이 떠나는 것을 고귀하게 여기고 기실 그것이 안일한 소업도 아니지만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절통한 반성을 해봄이 필요치 않을까? 현실 즉 세상과 등져 청백하게 산다는 것이 이상을 만족시키는 것과 보다 가까운 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고기가 물속에서만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이 시대를 초월해 살 수 없는 것은 뻔한 진리다. 이 엄연한 현실에 눈을 가린대자 현실이란 시대의 물결은 제대로 치받고 에워싼다. 그리하여 이상은 이상만으로 대굴대굴...극히 값없는 슬픈 결과를 지을 것이다. 그것으로서 체관한다면 문제는 단순하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렇듯 단순한게 아니다. 현실을 회피하고 물러나기엔 오로지 소극과 퇴보와 내지 죽음의 길만이 약속되었다. 우선 이 엄연한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생의 의의를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은 물론 청백한 은둔과 타락된 추종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문학이 인간 일생의 사업으로 적은 것인지 아닌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어쨌든 한 사람의 문학가로서 비록 한 가지 일에라도 집착하고 싶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늘날을 ‘신세대’라고 한다면 문학의 신세대는 무엇보다도 재래의 편협한 문단 분위기를 털어버려야 할 것을 요구한다. 전체적으로는 자체에 대한 절통한 반성이다. 홍수처럼 범람해진 소극적인 소비적인 문학과 결별하는 것은 은둔과 추종에서 벗어나는 문학적 신세대의 당연한 과제다. 시대적인 생활적인 문학의 길을 찾아가자. 그의 하나로서 흙의 문학-농민문학을 힘껏 쥐고 놀랸다. 흙 위에 버티고 서서.
이 글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 문단 및 지식인의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제 말의 문학은 협력과 저항으로 양분되었다. 협력의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를 일정하게 보존하면서 일본국민화를 주장하는 유진오식의 협력과, 차이를 무화시키면서 일본국민화를 부르짖는 이광수식의 협력이 함께 동거하는 상황이었다. 박승극은 이들 모두를 가리켜 ‘타락된 추종’이라고 부른다. 저항의 경우 박세영이나 신석정처럼 침묵을 통한 저항이 있고, 박승극처럼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우회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있다. 박승극은 전자를 가리켜 청백의 은둔이라고 하면서 가장 올바른 저항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검열의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도 구체적 생활의 기반 속에서 시대의 탁류에 맞서는 글을 줄곧 발표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승극에게 그 생활의 기반은 바로 농촌이었다. 수필 등을 통하여 농민의 삶과 희망을 말하는 농민문학이 그가 이 시기 이후 걷고자 하였던 길이다. 이 무렵의 농민운동은 과거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일제의 총동원체제가 판치는 시대에 농촌에서 농민들과 같이 하면서 그들의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하고 새로운 문명을 열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검열이 허락되는 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농민들의 삶과 미래에의 희망을 가꾸어 나갔다. 『다여집』에 실린 수필들이 때때로 지식인의 회의가 깃들어 있는 반면, 1940년 이후의 수필들은 그 시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희망을 잘 드러내고 있어 다소 대조적이다. 그는 수필을 유격적 장르라고 생각하였기에 잡지의 성격을 탓하지 않고 발표하였다. 당시 농민들을 대상으로 금융조합에서 발간하던 『半島の光』에는 한글로 수필을 발표하였고, 지식인을 대상으로 친일시인인 김용제 등이 발간하였던 『東洋之光』에는 일본어로 수필을 발표하였다. 친일 글로 도배하였던 『東洋之光』에 발표한 박승극의 일본어 수필들을 보면 놀랍게도 식민주의에 협력하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1945년 패망 직전까지 그가 발표한 일본어 수필에서 오로지 농민이 처한 비참한 현실과 이를 증언하는 관찰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당시 그 어떤 지식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유격적인 장르인 수필을 통하여 시대의 증인으로 남고자 하였던 그의 이러한 자세는 매우 드문 것으로, 한국근대문학사 특히 일제말의 문학사에서 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못하였던 박승극의 면모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시점이 점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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