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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지은이 : 진동일 해설.그림
가  격 :   8,500원
ISBN : ISBN 89-7193-138-8(03710)
초판발행일 : 2002년 4월
 
       
<노자 이야기>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격전 끝에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다.

고조가 건국할 무렵에는 이미 전국에 항우가 임금으로 봉건한 진(秦)의 무장(武將)이나 공신(功臣)이 있었다. 고조는 그들에게 기득권으로써 왕권과 영지의 소유를 인정하고, 다시 항우와의 싸움에서 활약한 한(漢)의 공신들에게도 각각 영지를 주고 임금으로 삼았다.

이처럼 유씨 일족 이외의 사람으로 영지를 받은 임금을 타성왕(他姓王)이라 한다. 그러나 고조는 국가가 안정되자 곳곳의 왕국(王國)이 자신이 죽은 뒤 강대해져 마침내는 한 왕실을 타도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쫓기게 되었다. 그래서 교묘한 수단으로 타성왕을 잡아 없애고, 황족 가운데서 후계자를 뽑아 그 뒤에 임금으로 앉혔다.

일찍이 항우를 상대로 들판에서 싸운, 고조와 고생을 함께 한 용맹한 무장들도 정치적인 능력으로는 고조와 전혀 맞설 수 없었으며, 건국기에 봉건된 타성왕은 하나하나 사라지고, 고조 시대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머나먼 호남에 있었던 장사국(長沙國) 단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장사국도 제 5대 정왕(靖王)에게 아들이 없어서 마침내 없어졌다.(B.C 157) 이리하여 한나라의 국내에 유씨 이외의 임금은 없게 되어 유씨 일족의 지배체제가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이 장사국의 승상이며, 뒤에 대(대)라는 땅에 영지를 받은 대후(대候) 이창(利蒼)과 그 처자의 무덤인 마왕퇴(馬王堆)가 발굴되었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은 당시 차츰 세력을 잃어가던 타성왕과 그 가신이 그래도 역시 전과 다름없는 화려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마왕퇴 유적은 호남성의 성도(省都) 장사시(長沙市)의 동쪽에 있는 높직한 언덕에 있다. ‘馬王堆‘란 ‘마왕(馬王)의 총(塚)‘이란 뜻인데, 본래 이 언덕은 10세기 중반에 그곳을 다스렸던 마은(馬殷)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므로 그렇게 불려졌다는데, 발굴 결과 훨씬 오래된 한대(漢代)의 유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왕퇴에는 세 무덤이 있는데, 각각 발굴 순서대로 1호묘, 2호묘, 3호묘라고 부른다. 처음으로 발굴된 1호묘에서는 50살 정도 된 여성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그 주검은 2천년 전 이상의 것인데도 살갗에는 아직 탄력이 있었으며, 해부까지 할 수 있었다.

해부 결과 죽은 까닭은 심장병이라고 추정되었고, 그녀에게는 본래 류머티즘이란 지병이 있었으며, 또한 위 속에서는 참외씨가 나왔으므로 그녀가 죽기 직전에 참외를 먹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정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는 발견으로서 세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마왕퇴의 무덤에서는 주검 외에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많은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특히 3호묘에 있었던 옻칠한 상자에서는 많은 양의 백서(帛書)와 의학서라고 여겨지는 죽간 2권 등 모두 2천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노자』(老子)도 들어 있었다.

노자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출현한 ‘제가백가(諸子百家)‘라 불리우는 사상가 집단의 한 사람으로, 『사기(史記)』 등에 전하는 바로는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라 하며,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의 장서실 관리로 있었다고 하지만, 아마 실제 인물은 아니고 뒤에 도가(道家)를 세운 학파가 시조로서 만든 가공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서책으로서의 『노자』도 춘추시대 말기 노자가 난세를 피하여 함곡관에 이르렀을때, 윤희(尹喜)가 도를 물으매, 도덕 5천언(言)을 적어 준 책이라 전해지나, 용어나 문체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므로 한 사람이 쓴 저술은 아니고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도가 사상가의 언설을 오랜 기간에 걸쳐 한데 모았으며, 최종적으로는 진(秦)나라 말, 한나라 초에 완성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노자』가 말씀한 사상은 우주 창조에 앞서 존재한 근원적인 진리인 도(道)를 구명하여 그것에 따라 생기는 것을 요점으로 하며,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자세를 강조한다.

한나라 초기는 진말(秦末)의 동란이 수습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것에 소극적인 경향이 강하며, ‘무위(無爲)로써 다스린다‘ 라는 노자의 사상, 결국 인지(人知)를 움직여 갖가지를 하면 하는 만큼 오히려 혼란하며, 마침내 파멸에 이르므로 자연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거꾸로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는 생각이 시대와 맞아 떨어져 지배계급 사이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마왕퇴에서 『노자』의 고사본(古寫本)이 발견된 것도 그러한 한대(漢代) 초기의 시대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왕퇴의 『노자』에는 갑본(甲本)과 을본(乙本) 두 종류가 있다. 갑본은 『노자』 뒤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 1종이 붙어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464행에 1만 3,000자 정도인데, 사용된 글자는 소전(小篆)에서 예서(隸書)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서체, 즉 전서와 예서의 중간 글씨체로, 그것을 ‘초전(草篆:흘린 전서)‘이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

한편 을본쪽은 ‘황제사경(黃帝四經)‘이라 이르는 문헌 뒤에 적혀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152행에 1만 6,000자 남짓 되며, 글씨체는 확실한 예서이다.

현재의 『노자』는 상편인 도경(道經), 하편인 덕경(德經) 2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별명을 『노자 도덕경』이라 한다. 그런데 마왕퇴에서 나온 『노자』도 역시 상하 2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상편이 덕경, 하편이 도경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책과는 구성이 다르다. 또한 상하 각편 속에도 장(章)의 순서가 현재의 책과 다르며, 문장에도 차이가 있어 『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어쨌거나 도덕과 가치관이 인간의 세치 혀 위에서 농단되고, 하늘과 땅의 본성이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크게 흔들려지고 있는 이즈음 무위의 치(治), 무위의 처세훈을 설파하는 『노자』를 가까이함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참뜻을 되새기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