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도서안내 > 민족무예
 
더불어 춤, 땅고Tango
지은이 : 이기현
가  격 :   17,500원
ISBN : 978-89-7193-214-8 (03690)
초판발행일 : 2014년 1월
소통과 공감의 기술
더불어 춤, 땅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더불어 잘 살려면 무엇보다 소통을 잘 해야 한다. 이것이 잘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소통하기‘가 어렵다. 최근 여기저기에서 “소통!”을 외쳐대고 있음은 거꾸로 불통이 만연한 시대임을 역설하고 있다.

언어는 속마음, 감정까지 온전하게 전달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사람은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을 해버린 순간 그 안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자기 스스로 거짓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존재’를 정의(定義)내린 대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으며, 누군가 정의내린 ‘사랑’이란 것에서 벗어난 행동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이 독단이다. ‘비가 내린다’지만 내리지 않는 비는 없고, ‘꽃이 핀다’지만 피지 않은 꽃은 없듯 인간이 정의내린 대로인 ‘그런 것’들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해서는 이심전심으로 소통하기 대단히 어렵다. 소통을 바랐으나 정작 바라지 않게 불신이 생겨났다. 세상이 노자가 주장한 ‘무위자연(無爲自然)‘한 원리대로 온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 또한 명백하다. 고의든 선의든 바로 그 거짓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 언어가 아닌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내놓기 전 특수 상대성 이론을 먼저 발표했다. 이와 비슷하게 언어가 아닌 것, 다시 말해 거짓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특수한 조건하에서 소통하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랬을 때 비로소 무위자연의 이치가 허황된 이론이 아닌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열쇠이자 원리임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특수한 조건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이다. 남은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즉 몸은 거짓을 모른다. 언어를 매개로 나와 타인간의 소통을 논하기 전 적어도 세 단계의 소통이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 ‘무게중심(또는 단전 또는 코어(核))’을 매개로 ‘마음(=마음 나)’과 ‘몸(=몸 나)’ 사이의 소통이다. 이 때 몸은 마음의 타자가 된다. 같은 ‘나’지만 그것을 두 요소로 분리함으로써 서로 교감하는 관계가 새로 설정된다.
둘째, ‘중력’을 매개로 ‘나’와 ‘지구’ 사이의 소통이다. ‘나’가 체중을 온전히 놓을 줄 알면 작용이 땅(=지구)으로 내려가며 다시 반작용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척추를 저절로 바르게 펴진다.
셋째, ‘몸’을 매개로 ‘나’와 ‘타인’ 사이의 소통이다.

땅고(Tango)는 두 남녀가 더불어 함께 추는 춤으로 나와 타인이 몸 언어로써 서로 소통한다. 언어를 배재한 채 서로가 맞잡은 팔을 통해 무수한 교감이 오가는 것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 테마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동안 무술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춤(땅고)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노력 끝에 무술과 춤을 하나의 원리로 관통시켰다는 것에 남다른 보람과 자부심을 독자들에게 내놓으며, 몸을 통한 순수한 소통을 체험한 다음 마침내 언어를 매개로한 소통에 도전을 요구한다.

 
         
<논어(論語)> 서두에 나오는 ‘학이’ 편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을 출발하고 싶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단 세 줄에 불과하지만 나로선 도무지 공감을 못했던 글이었다. 학(學)하고 습(習)하는 게 뭘 그렇게 기쁜지, 멀리서 친구가 온다는 말은 중간에 왜 끼어들어가 있는지, 살다보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이 분은 왜 화가 났으며 또 굳이 화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고 계신지…. 더구나 저 세 문장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른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의문점들이 적어도 스스로 납득할만한 수준에서 모두 풀린 게 불과 수 년 전이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던 시기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을 테니 거의 삼십여 년 가까운 세월이 소요된 셈이다.

우선 첫 번째 문장에서 이 말씀을 처음 남긴 분이 가리키는 학(學)과 습(習)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현재 내 삶 가운데 난 무엇을 학과 습으로 여기고 있는지 곰곰 생각하니 저절로 의문이 풀렸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 학파를 쾌락주의자들이라고 배웠다. 단지 이 사실만을 들었을 땐 음주, 마약, 도박, 여색 등등 죽을 때까지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사람들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집단은 거꾸로 금욕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육체적 쾌락은 진짜 쾌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남자가 어쩌다 큰돈을 모았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음주와 여색에 빠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인 것이다. 집착이 심하면 몸이 망가지고 집착이 덜한 경우 결국엔 질린다. 그리고 인간은 권태를 느낀다. 경제적으로 생존이 시급한 상태에 놓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하지만 충분한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태를 견디기 어려워 아무 일이라도 해서 그것을 잊으려고 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힘들게 획득한 경제적 자유를 마다하고 다시 자청하여 일자리로 복귀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 최고의 쾌락은 권태를 느끼지 않는 기술, 즉 ‘빈둥거림’에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최고의 빈둥거림은 죽을 때까지 심심하지 않을 것 ‘하나’를 잡아 평생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음주와 여색은 하루 24시간 내내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그 하나가 될 수 없다. 멋있게 잘 빈둥거리기 위하여 현재 내 삶 가운데 이 하나에 가장 접근한 나만의 학이시습이란 곧 ‘책 읽고 운동하고’다.

나는 매일 운동하므로 건강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편이다. 즉 운동 목적이 건강을 지키기 위함은 아니다. 쿵푸[工夫], 즉 ‘몸 공부’를 하는 것이다. 뒤에 상세히 밝히겠지만 운동은 운(運)하고 동(動)하는 것이다. 이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글들의 의미가 새삼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럼 마음이 감응(=感)하여 움직이게(=動) 되어 큰 희열을 느낀다. 이걸 평생 반복하며 사는 게 내가 보기엔 최고의 빈둥거림이다. 그러고 나니 그저 밋밋하게만 느껴졌던 <논어> 첫 구절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이었는지 비로소 공감할 수 있었다. 책 읽고(=學) 운동하니(=時習) 기쁘지 아니한가(不亦說乎)!

두 번째 문장은 책 읽고 운동하다가 가끔 심심할 때 친구를 만나 술이라도 마시며 수다 떠는 게 즐겁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지만 이래 버리면 격이 떨어지는 푸념조의 문장으로 전락해 버린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김춘수의 시 <꽃>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멀리서 친구가 찾아온다‘는 게 ‘그가 나에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거라고 가설을 세운 뒤 다시 찬찬히 보니 겨우 의문이 해결되었다.

‘불역락호‘의 락(樂)을 ‘즐겁다‘고들 해석하지만 내 느낌에 더 적절한 표현은 ‘뿅~ 간다’가 맞다고 본다. 마음이 그냥 기쁜 정도가 아니라 엑스타시나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비슷하게 큰 정서적 충격을 받아 살짝 돈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새로운 각성(覺醒), 즉 ‘멀리서 친구가 왔을 때 =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던 그 때’ 그 순간을 묘사한다면 ‘불역락호‘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 문장은 그에 합당한 각성을 몸으로 체험했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감탄사다.

사과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이에게 사과 맛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불역락호 또한 그런 것이다. 눈앞에서 보물을 보여 주어도 대다수가 볼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고생하여 겨우 안 것이지만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질 않으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안타까운 마음 외에 달리 사람들과 이것을 함께 공유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문장 ‘인부지이불온’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보았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내 식대로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책 읽은 대로 운동에 적용해 보고, 운동한 대로 글을 공감할 수 있으니 기쁘다.
(그 결과) 드물게 (대오각성은 아닐지라도) 각성이 올 때마다 뿅 간다.
(각성을 체험 못한) 사람들과 이것을 공유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진 말자.

사실 이 책은 앞서 낸 <명상적 걷기>의 원고를 쓰던 당시 대강의 구상을 끝내 놓았었다. 내가 주창하는 메시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명상적 걷기>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던 중요한 한 가지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 한 가지란 다름 아닌 ‘소통’이다.

<명상적 걷기>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의 운동 체험을 근거로 바르게 걷는 원리를 설명한 책이지만, 단순히 걷는 법, 곧 테크닉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소통의 의미가 조금이나마 언급되어 있다. ‘나‘와 ‘몸 나‘와의 소통이 그것이다. ‘나‘가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에 팔 또는 다리를 직접 제어하는 게 아니고, ‘몸 나‘와 먼저 통신을 주고받은 후 ‘몸 나‘를 통해 팔 또는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가 직접 팔, 다리를 움직이면 팔 힘 또는 다리 힘이 나올 뿐이지만, ‘나‘가 ‘몸 나‘를 통해 팔, 다리를 움직일 줄 알게 되면 비로소 ‘몸 힘‘이 나온다. 몸 힘은 ‘나‘와 ‘몸 나‘의 소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보물, 바른 움직임의 비결인 것이다. 이때의 ‘몸 나‘는 매우 특별한 무게중심으로 옛날엔 단전(丹田)이란 말로 불렸던 개념이다. 또한 지구의 중심에 코어(the core, 核)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몸 나‘를 코어라 불러도 무방하다.

‘나‘와 ‘몸 나‘의 소통이 잘 되면 ‘나‘는 ‘몸 나‘를 매개로 지구와의 소통을 경험하게 된다. 지구와 ‘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 중력(=gravity)을 거스르지 않고 무위자연하게 움직이는 법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말이다.

‘나‘가 ‘몸 나‘와 소통하는 원리를 알고, ‘몸 나‘를 통해 지구와 소통하는 원리를 알았으니 이젠 ‘나‘와 ‘타인‘과 소통하는 원리를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나‘와 ‘타인‘ 사이의 매개체가 언어라면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 전달의 불완전성과 모순 관계들, 나아가 모든 인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치명적 사실로 인해 언어를 통해서는 ‘나‘와 ‘타인‘이 무위자연하게 소통하는 원리를 깨닫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거짓을 전혀 모르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의 몸(!)인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언어를 통해서도 ‘나‘와 ‘타인‘과의 소통에 도달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전에 거짓을 모르는 몸과 몸이 서로 소통하는 감동적인 체험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단계의 소통을 모른 채 복잡계의 소통을 말하는 건 그야말로 사상누각이 아니겠는가?

땅고(Tango)는 ‘나‘와 ‘타인‘이 몸 언어를 써서 서로 소통하는 공부를 위해 내가 선택한 방편이다. 이것은 두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다. 수많은 것 중 왜 춤을, 그 중에서도 땅고를 선택했는가 하면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명상적 걷기의 응용으로서 땅고는 매우 이상적이다. 간단히 말해 혼자 걷기를 지나 둘이 함께 걷는 것이 땅고인 것이다. 걷기를 잘 못하면 땅고는 대단히 어려운 춤이다. 걷기를 잘하면 그저 음악에 맞추어 걷는 것만으로 저절로 땅고가 된다. 명상적 걷기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웬만큼 몸으로 숙달시킨 단계로 올라왔을 때에만 땅고 댄스를 즐길 수 있다.

둘째, 음악에 맞추어 걷는다. 그냥 걷기보다는 음악에 맞추어 걷는 것이 훨씬 덜 지루하다. 물론 땅고 음악을 좋아해야한다는 전제가 따라야 하겠다. 땅고는 춤이고 춤에는 음악이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잘 걷는 것만으로는 땅고를 즐기지 못한다. 땅고 음악이 담고 있는 그 경이로움! 그것을 듣고 전율과 감동을 느끼는 체험이 있은 후에 진정 땅고에 맞추어 걷는 것, 즉 땅고 댄스가 가능해진다.

셋째, 남녀가 홀드(hold, 춤에서 남녀가 서로의 팔을 맞잡는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를 하고 함께 걷는다. 땅고를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녀의 의미란 결국 양과 음의 조화다. 양과 양의 만남은 충돌이 일어나기 쉽고 자연계를 보아도 수컷끼리는 조화보다는 공격성을 드러내기 일쑤다. 땅고는 양과 음이 만나므로 양은 음의 섬세한 몸 힘을, 음은 양의 강한 몸 힘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상적인 몸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상대를 통해 깨닫게 해 준다. 땅고는 두 사람이 한 동작처럼 움직여야 한다. 이를 위해 기술적으로 코어를 써서 움직이는 이치를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 책은 몸과 관련하여 쓴 네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무술에 관한 에세이였고, 두 번째 책은 몸만들기의 핵심을 다루었고, 세 번째 책은 명상적 걷기의 원리를 설명하였고, 지금 이 네 번째 책은 걷기의 응용으로서 땅고, 즉 춤에 관한 이야기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인간의 몸을 찾아 떠났던 나의 긴 여행은 무술에서 출발하여 춤에서 일단락되었다. 마치 견우(=무술)와 직녀(=춤) 사이에 오작교(=몸만들기 + 명상적 걷기)를 놓아 서로를 만나게 한 것 같은 묘한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예상치 않았던 것이지만 무술과 춤을 하나의 원리로 관통시켰다는 것에 남다른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끝으로 오랜 기간 이 길을 함께 걸어온 학민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