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얼굴살을 후비던 어느 겨울날,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거리에서 군고구마를 샀다. 바가지를 쓰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 하며 비닐 봉지에 고구마를 담아주는 아저씨 손톱에 낀 검뎅에 질겁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통만한 고구마 몇 알에 5위안이라 해서 깜짝 놀랐다. 5위안이면 650원인데… 그 걸로 하루종일 밖에 서 있는 값이나 나올까… 군고구마 몇 알을 사는 내게 아저씨가 건네는 미소가 고구마보다 더 따끈했다. 바가지를 쓰지 않을까 옹졸한 마음이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 날, 비닐 봉지를 들고 돌아서며 군고구마 냄새와 관련한 여러 가지 어린 날의 추억에 눈물이 어렸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몸부림치던 날들. 나는 방바닥에 누워서 세상을 여행하곤 했다. 책을 읽으면서, 끄적거리면서… 훗날에 나는 홀로 세상을 여행하고, 베푸는 일에 참여하고, 그 경험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자 했었다. 처음 내가 한국을 떠났던 것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출발이었다. 한국은 떠났다. 떠나는 건 간단했다. 그러나 애초에 쓰고자 하는 책은 아직까지 쓰지 못했다. 계획했던 경험에서 다른 쪽으로 향로를 바꾸어 왔기 때문이다. 대신 난 상하이에서 바쁘고도 단순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책을 읽을 시간도, 방에 누워 공상을 할 시간도, 혼자 있을 시간도 없이. 책을 읽지 않는 나 자신이 낯설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핑계임에도 매일매일이 숨돌리기 바쁘게 돌아가지 않는가. 끝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뚜렷한 방향도 없이 바쁘기만 한 게 좋은 일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왜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까, 자책을 해보지만 집중을 하고 싶어도 이제 그럴수가 없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내 손에는 그 일들과 연결된 끈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상하이 파워‘라고 부른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것. 여러 가지 일에 연루되어 살고 있다. 애초에 나 스스로 뛰어들기엔 불가능한 것들에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곳, 그곳이 상하이다. 나의 에너지는 여러 가지 색깔로 각각의 얇은 막에 싸여 내 안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다 기회를 만나면 폭죽처럼 튀어나온다. 내 안에 그 많은 에너지들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것을 끌어낸 것이 상하이다. 처음 상하이에 와서 어리둥절하던 마음, 절대로 1년 이상 견디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날들, 모든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답같던 날들. 그런데 친구들이 생기고, 갈만한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 어떻게 가격을 흥정할 수 있는지 알게 된 지금은 상하이가 오히려 푸근하다. 사랑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도, 용서하는 일도 하룻만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이 소중하다. 어렵고 답답하고 흥겹고, 때로 미친듯한 시간들을 함께 보낸 사람들. 어딘지 모르게 좁은 항로를 나와 함께 가고 있는 완춍과 쒸보, 독수리 눈으로 찍은 소중한 사진들을 기꺼이 건네준 정희와 규민, 아무에게나 카메라를 들이밀어 파파라치라는 별명을 얻은 쟝종매이,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아낌없이 찬조를 해주시는 이화원의 유선자 사장님과,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준 영혼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사랑을 보낸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늘 반가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