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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이야기- 도포 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지은이 : 윤성렬
가  격 :   10,000원
ISBN : 89-7193-166-3 (03370)
초판발행일 : 2004년 9월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은 단순히 새로운 교육기관이 등장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5백년 이상 봉건 유교사회의 폐쇄성에 잠들어 있던 한반도는 배재학당의 설립을 계기로 서구 신문화에 본격적으로 노출되게 된 것이다. 상투를 잘라 버리는 단발령의 개인적 충격으로부터 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왕조에 대한 공화사상의 도전이라는 국체의 변혁문제에 이르기까지 2천년 한반도를 지배해온 민중의 삶과 생각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2, 30년의 짧은 기간에 큰 변화를 보게 된 것이다.

배재학당은 이 시기에 숱한 ‘한국 최초’의 사건들을 뱉어낸다. 최초의 학제, 최초의 교과서, 최초의 입학식·방학식, 최초의 운동경기, 최초의 국제학교, 최초의 사범학교, 최초의 대학 설립, 최초의 학생회, 최초의 동맹휴학, 최초의 교복 착용 등 19세기 말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진 ‘한국 최초’는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배재학당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조선 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으로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일 때 이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노력한 활발한 민족자강운동에 있다 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일꾼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학생 자치조직인 협성회, 민족자주운동체인 독립협회에 대한 뒷받침, 정치개혁운동인 만민공동회의 적극적 참가, 3·1운동, 6·10 독립만세운동 주도, 일제하 농촌계몽운동 등 민족의 암흑기에고난을 무릅쓰고 활동했던 배재학당의 교사, 학원들의 활약상은 한국 현대사 속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120년 전 학당 설립에서부터 일제 강점하 민족의 암흑기까지 활동했던 배재학당에 대해 테마별로 엮어 쓴 신교육 이야기이자 신문화 이야기, 민족운동 이야기이다. 또한 개화기 민중들의 전근대적 삶과 생각이 신문화를 만나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새로운 삶의 형태로 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에피소드들은 이 책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듬뿍 안겨준다.
 
         
나는 경기도 용인시 신갈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들이 즐비하여 제법 도시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신갈은 대부분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버스도 수원행이 하루에 서너 회, 수여선 협궤열차가 아침 저녁으로 잠깐 서서 수원 통학생들을 태우고 내리게 하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6·25 동족상잔으로 온 국토가 피폐화되어 절대적인 빈곤으로 전 국민이 기아에 허덕이던 그 시절, 농촌의 어려움은 도시에 비해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절에도 허리띠 졸라매고 노동에 지친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자기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 내 고향 신갈에서도 없는 살림에 모두 수원으로, 서울로 자식들을 유학시켰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돈들여 객지에 하숙시키기가 부담이 되어 대부분 통학거리가 되는 수원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한 학년에 한 두 명은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남학생의 경우는 대개 배재중학을 택했다. 서울로 유학간 선배들이 배재에 다니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레 ‘유학 상담’을 할 때 배재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다닌 학교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같다. 195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최소한 농촌에서는 국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1961년 봄, 나는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비록 농촌 학교였지만, 초등학교에서 1등을 다퉜던 나는 고만고만한 서울 깍쟁이 친구들의 학업성적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았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배재학교 시설과 수업과정, 선생님들의 학식과 품성에는 ‘촌놈’으로서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배재에서 보낸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은 내 청소년기의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배재에서의 6년은 “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겨라”라는,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교훈의 참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것같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나름대로 사회와 민족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면서 지금까지 고난을 다하며 몸바쳐 왔던 바탕에는 격동의 19세기 말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배재의 자주 독립사상, 민주 민권정신이 그 토양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 신문화의 요람, 신교육의 발상지, 민족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배재인들의 활동과 그 정신사를 체계적으로 후학들에게 알려주고, 또 이를 전승시키려는 배재정신사의 정립이 그간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선생님들이 간간히 들려주던 일제 하에서 경성중학 학생들과의 편싸움, 축구, 야구, 럭비, 육상 등 운동부의 전국대회 제패에 대한 이야기만이 쪼가리로 기억에 남은 것으로도 그 아쉬움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1977년 2월 3일부터 기획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배재학당 이야기를 총 67회에 걸쳐 연재하기 시작했다. 집필자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1898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 졸업하고 나서 일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살아오신 배재의 대선배 윤성렬 목사님이셨다.

나는 당시 이 연재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꼼꼼히 찾아 읽는 한편, 이를 모두 스크랩을 하여 고히 간직하여 두었다. 그후 가끔 그 스크랩을 꺼내 뒤적여 보다가 문득 이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 내면, 재미가 있으면서도 배재학당의 활동과 배재정신을 잘 보여주고 교육할 수 있는 책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쳤을 뿐 진척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금년 봄 모처럼 시간이 나 스크랩을 다시 찾아 책으로 만들 수 있게 원고화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처럼 한 권의 책으로 훌륭하게 펼쳐 나왔지만, 그 과정에서 어려움과 고민스러운 부분 또한 적지 않았다. 첫째 스크랩이 너무 오래되어 글자들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윤성렬 대선배님께서는 이미 작고하여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고, 둘째 배재학당에 대한 이야기의 전개가 8·15 해방으로 끝이 나 있는데, 그 이후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고민으로 편집이 원활하게 진척되지 않았으나, 더 이상 해결할 길이 없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고 다시 발간을 추진하기로 했다.

1. 사실관계의 오류 이외에는 원문을 그대로 싣는다.
2. 사진 자료는 원문과 관계없이 새로이 구해 싣는다.
3. 원문에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각주로 보충한다.
4. 8·15 이후 부분은 아직 역사의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으므로 보충하지 않는다.
5. 윤성렬 선배님이 작고하셨으므로 머리말은 내가 쓴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 각주를 달고, 문장을 정리하고, 내용을 보완하는 일을 전적으로 내가 맡아 했다. 이 과정에서 윤선배님의 사위이신 전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 유동식 박사님과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윤선배님의 따님이신 전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가 쓴 윤선배님의 전기 『산초의 씨름』을 구해 읽었는데, 그 책에서 배재학당 이야기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산초의 씨름』을 통해 배재학당의 대선배이신 윤성렬 목사님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살아오신 윤선배님 가족들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덤 이상의 감동이었다. 삼가 존경의 염으로 고 윤성렬 선배님과 그 가족들께 인사를 드린다.

끝으로 이 책이 배재학당의 창립정신과 활동, 그리고 그 속에 삼투되어 있는 애국애족과 봉사이타의 배재정신을 온 국민들에게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큰 보람이 없겠다. 특별히 2만여 배재 동문, 재학생들의 큰 관심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