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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몸 만들기
지은이 : 이기현
가  격 :   10,000원
ISBN : 978-89-7193-195-0 (03690)
초판발행일 : 2009년 12월
이 책은 무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무술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정작 없다. 그보다는 무술을 잘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몸만들기를 주로 정리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무술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이 진정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무술’이 아니라 ‘몸’이다. 다시 말해 바른 몸 움직임을 아는 것이다.
무술은 몸을 알기 위하여 선택한 수많은 방편 중의 하나다. 무술가의 몸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신체균형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의 결실이다. 기법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아무리 숙련된 기법들도 신체능력의 토대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 치중하게 되는 것은 힘과 지구력, 그리고 스피드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것을 갈고 닦는 것이야말로 무술가가 해야 할 의무다. 나아가 이것은 단순히 격투기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르고 참된 움직임에 접근해 가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바르고 참된 움직임이라는 것은 몸이 참 편하다고 느끼게 되는 움직임이다. 이는 곧 편함을 방해하는 불필요함이 완전히 제거된 움직임이다. 그것은 바르게 움직이기 위하여 오로지 필요한 것 하나만 남았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 움직임을 깊이 연구하다 보면 움직임의 중심, 핵심이 되는 어느 한 점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바로 그 ‘그것’을 알고 깨달아, 뇌는 ‘그것’만을 제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것에 맡기는 것, 이로써 몸 전체가 저절로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르고 참된 움직임이다.

‘그것’을 아는 앎이 깊어질수록 몸이 무위(無爲)에 가까워짐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것’을 더 깊게 알기 위하여 주변 근육들(=파워하우스)을 단련시켜야 하고, 유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모든 수련은 ‘그것’을 알기 위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나아가 ‘그것’을 아는 앎은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는다. 이로 인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진다. 옛글은 단순히 좋은 게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공감하는 말씀(logos)으로 화(化)하므로 감동을 준다. 그 말씀으로 인해 자율성의 도덕적 압박을 받는다. 원래 폭력의 기술에 불과하였던 무술이었지만,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바르고 선한 사람이 되는 길(道)을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위 ‘몸짱’이라는 신조어로 대표되는, 상업화된 몸만들기에 대한 기법들은 바른 움직임에 대한 개념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단순한 건강증진이나 외양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에만 목표가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힘이나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는 될 수 있어도, 오직 그것만을 평생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인간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은, 바른 길 가기를 통하여 끝없이 덕(德)을 쌓는 일이다. 이 책은 그 길을 안내한다.
 
           
졸저 ‘그 남자의 무술이야기‘를 낸 후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간 것이 몸만들기에 관한 책이었다.
무술에 관한 에세이를 썼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몸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 생각했다.
수련이야 평소 꾸준히 하던 것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나름 열심히 쓴 원고를 검토하다 스스로 부끄러워 폐기처분한 것이 수차례다.
써 내려 갈 때에는 몰랐는데 전체를 놓고 읽어본 즉 무작정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설득력 없는 내 주장만 잔뜩 들어있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련으로 쌓인 경험을 통해 일부 내용이
전혀 잘못되었음이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솔하게 내용을 수정하지 않은 채 책으로 나왔다면 얼마나 큰 망신이 되었을지 식은땀이 흐른다.
마침내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구나를 깨달은 후 좀 더 신중하게 글을 쓰고 다듬었고
내용이 정말 옳은지 그른지를 검증하기 위한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자체적으로 잘못이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원고를 묵혀 두었다.
여전히 채 발견 못한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직접 몸을 통해 얻은 결론에 대하여 상당한 확신을 갖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무술은 폭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더 이상 무술은 폭력의 기술이 아니다.
만약 무술 = 폭력이라면 수련을 오래할수록 점점 더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개인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는 공식 시합에서 이기는 기술들만이 살아남아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이하게도 무술에는 ‘무덕(武德)‘이라고 하는 모순되는 요소가 같이 들어 있다.
어떻게 싸우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덕(德)과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나를 오랜 세월 괴롭혀 왔던 고민거리였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더니 이제 조금이나마 말 할 여지가 생겼다.

내가 주목한 것은 무술 수련의 과정이다.
누군가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 무술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련하는 과정 자체가 곧 무술을 수련하는 의의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무술가의 몸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신체 균형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의 결실이다.
기법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아무리 숙련된 기법들도 신체 능력의 토대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치중하게 되는 것은 힘과 지구력과 스피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이것을 갈고 닦는 것이야말로 무술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다.
나아가 이것은 단순히 격투 기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르고 참된 움직임에 접근해가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르고 참된 움직임이라는 것은 몸이 참 편하다고 느끼게 되는 움직임이다.
몸이 참 편하다고 느끼게 되는 움직임은 불필요함이 완전히 제거된 움직임이다.
불필요함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오로지 필요한 것 하나만 남았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 움직임을 깊이 연구하다 보면 움직임의 중심, 핵심이 되는 어느 한 점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바로 그 ‘그것‘을 알고 깨달아, 뇌는 ‘그것‘만을 제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것‘에 맡기는 것,
이로써 몸 전체가 저절로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르고 참된 움직임이다.

‘그것‘을 아는 앎이 깊어질수록 몸은 무위(無爲)에 가까워짐을 발견했다.
‘그것‘을 더 깊게 알기 위하여 주변 근육들(=파워하우스)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것‘을 더 깊게 알기 위하여 관절이 유연해야 한다.
모든 수련은 ‘그것‘을 알기 위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무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술을 방편삼아 ‘그것‘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한다.
폭력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이용한 움직임을 깨닫기 위한 방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몸 힘‘이 나온다.
‘그것‘을 이용할 수 없으면 ‘팔 힘‘이 나온다.

무술가란 ‘그것‘을 바르게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것‘을 더 깊이 알아가고자 길(道)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길을 반복하여 감으로써 덕(德)이 쌓인다.

‘그것‘을 아는 앎은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앎으로 인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진다.
옛 글들이 단순히 좋은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공감하는 말씀(logos)으로 화(化)한다.
그 말씀으로 인해 자율적인 도덕적 압박을 받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무술가의 이상적인 모습이자 무덕의 실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나는 여전히 보다 나은 사람, 무술가로 진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확신에 차서 내뱉은 말과 글이 어느 때에 이르러 다른 견해로 바뀔 여지는 항상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소박한 앎일지라도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상당히 많은 세월이 걸렸다.